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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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시장은 전략이 아니다

삼성전기 · 기업 해부 01

이번 주 한 경영 세미나에서 삼성전기 인사 담당자가 회사와 조직을 바라보는 방식을 들었다.

메시지는 간명했다. 삼성전기는 규모로 삼성전자가 되려는 회사가 아니다. 자신감의 근거는 다른 데 있다. 인공지능이 다음 성장산업이라면 인공지능에 공급할 수 있다. 우주산업이 앞서간다면 우주산업에 공급할 수 있다. 자동차가 바퀴 달린 컴퓨터가 된다면 자동차에 공급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각화된 부품회사가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전략의 결이 다르다.

삼성전기는 어떤 산업이 다음 승자가 될지 정확히 맞힐 필요가 없다. 승자가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물리적 제약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유행이 곧 제품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모델이나 반도체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실제 제품이 되려면 그 밖의 물리적 조건이 따라와야 한다.

연산량이 커질수록 전력은 더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칩의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연결은 더 빠르고 정밀해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움직이는 기계에는 더 나은 감지 능력이 필요하다.

삼성전기는 이 세 지점에 모두 걸쳐 있다.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는 전력을 안정화한다. 반도체 패키지기판은 고성능 칩과 주변 시스템을 연결한다. 카메라 모듈은 스마트폰과 자동차, 로봇이 주변을 보게 한다.

적층세라믹콘덴서와 첨단 패키지기판, 카메라 센서가 하나의 전자 시스템을 이루는 모습
AI는 전력과 연결, 감지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제품이 된다.

제품은 서로 다르지만 맡은 일은 같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생기는 물리적 병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유행보다 병목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성장이 둔화해도 인공지능은 가속할 수 있다. 자동차에는 더 많은 컴퓨터가 들어가고, 로봇은 공장 밖으로 이동한다. 고객과 용도는 바뀌지만 안정적인 전력, 고밀도 연결, 신뢰할 수 있는 감지에 대한 수요는 함께 커진다.

삼성전기가 파는 것은 유행 자체가 아니다. 유행이 실제 제품으로 구현되기 위한 조건이다.

시장보다 이동성이 높은 병목

이 관점으로 보면 최근 실적의 의미도 달라진다.

삼성전기는 2026년 2분기 실적에서 매출 3조 4,572억 원, 영업이익 4,404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매출은 24%, 영업이익은 107% 늘었다. 회사는 AI 서버와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자동차용 MLCC, AI 가속기와 서버 CPU용 고부가 패키지기판 등을 성장 요인으로 들었다.

매출 증가는 중요하다. 그러나 영업이익 증가율이 매출 증가율의 네 배를 넘었다는 점이 더 눈에 띈다. 이 숫자만으로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출하량뿐 아니라 실패 비용이 크고 기술 난도가 높은 제품 쪽으로 사업 구성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매출보다 영업이익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흐름을 전자부품 구조로 표현한 이미지
매출은 24%, 영업이익은 107% 늘었다. 두 증가율의 간격이 신호다.

약 1조 5,000억 원 규모의 실리콘 커패시터 공급 계약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계약 기간은 2027년부터 2028년까지다. 실리콘 커패시터는 AI 서버의 GPU와 HBM 패키지 안에서 전원을 안정화하는 부품이다. 삼성전기는 이 시장이 까다로운 인증 절차와 높은 기술 장벽 때문에 소수 기업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부품은 완성 직전에 카탈로그를 보고 고르는 소모품과 다르다. 고객 시스템 안에서 검증되고, 향후 생산계획에 맞춰 공급능력이 준비된다. 공급자는 고객의 의사결정에 더 일찍 들어가고, 고객이 공급자를 교체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은 커진다.

이것이 병목을 차지하는 전략의 장점이다. 하나의 시장에만 베팅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 다른 시장에 같은 근본적 이유로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전략은 조직 설계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세미나가 더 흥미로워진 것은 제품에서 사람 이야기로 넘어간 뒤였다.

발표자는 삼성전기가 상대평가보다 절대평가에 무게를 두고, 일대일 대화와 코칭을 조직에 정착시키려 노력해 왔다고 설명했다. 관리자의 역할도 연말에 등급을 배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구성원이 성과를 내도록 돕는 대화가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이 내용은 이날 발표에서 들은 현장 관찰이다. 삼성전기의 대외 공시를 일반화한 주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단순한 인사제도 사례가 아니라 사업전략을 실행하는 조직의 문제로 볼 만하다.

회사의 우위가 더 어려운 기술적 제약을 반복해서 푸는 데서 나온다면, 연차보다 전문성이 중요하다. 내부 순위보다 학습이 중요하다. 등급만 배분하는 관리자보다 어려운 목표를 세우고 문제를 일찍 드러내며 다음 시도를 개선하도록 돕는 관리자가 더 필요하다.

좋은 전략도 사람을 관리하는 방식 때문에 무효가 될 수 있다. 전문성이 해자라고 말하면서 연차에 보상하고, 실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나쁜 소식을 일찍 알린 사람을 벌주고, 고객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서 정해진 상위등급을 두고 동료끼리 경쟁하게 만들 수 있다.

전략은 한 방향을 말하지만 조직의 설정은 다른 행동을 가르치는 셈이다.

첨단 전자 모듈과 그 아래의 운영 체계가 같은 방향으로 정렬된 모습
좋은 전략도 목표 설정과 평가, 관리자 육성 방식이 어긋나면 실행되지 않는다.

삼성전기 사례가 유용한 이유는 사업모델과 조직모델을 한 방향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은 기술적 병목을 차지하려 한다. 조직은 다음 병목을 해결할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적어도 이날 발표에서 확인한 두 이야기는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진짜 해자는 다음 병목을 찾는 능력이다

삼성전기를 MLCC, 패키지기판, 카메라 모듈을 만드는 회사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제품 목록 자체가 해자는 아니다.

더 깊은 해자는 복잡성이 이동하는 곳을 따라가 새로운 물리적 제약을 찾고, 양산이 시작되기 전에 고객의 설계 안으로 들어갈 만큼 그 문제를 잘 푸는 조직 능력이다.

이 사례는 모든 기업에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첫째, 어느 성장시장에 들어갈지만 묻지 말아야 한다. 여러 성장시장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제약은 무엇이며, 우리 조직은 그 제약을 남다르게 잘 해결할 수 있는가.

둘째, 목표를 세우고 사람을 평가하며 관리자를 육성하는 방식이 그 전문성을 더 강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좋은 전략을 조용히 취소하고 있는가.

성장시장은 관심을 모은다. 병목은 가치를 모은다.